배경 : 제후들의 부국 강병 추구 → 인재 본위의 관리등용 → 사인계층 등장
유가(유가) : 공자, 가족윤리의 사회 확대, 왕도 정치, 전통 중시하되 합리성 강조
도가(도가) : 노자, 인위적 도덕이나 제도 부정(무위자연), 장자가 계승, 작은 정부 지향
묵가(묵가) : 묵자, 차별없는 인류애(겸애설), 노동·근검·평등, 인재 등용 주장
법가(법가) : 한비자, 순자의 성악설(예사상)에 자극, 법질서 강조 ⇒ 전제 군주의 출현을 지지: 진(진)의 진시황
종횡가
중국 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정치적 책략으로써 당시 국제외교상에서 활약한 유세객(遊說客)들.
특히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로 대표되는 합종연횡(合縱連衡)의 책략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소진 등이 주장한 합종책(合從策)이란 당시 동쪽에 있던 연(燕) ·초(楚) ·한(韓) ·위(魏) ·조(趙) ·제(齊)의 6국이 연합하여 서방의 진(秦)나라에 대항하려고 한 정책이며, 장의가 내세운 연횡책(連衡策)이란 진나라와 6국이 각각 손을 잡게 함으로써 진나라의 발전을 꾀한 책략이다. 그들의 언동을 많이 수록한 서책이 《전국책(戰國策)》이다.
진나라(기원전.221~206, 15년간 통치)
최초의 통일제국 진-시황제
촉한시대
항우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가 패권을 잡음
유방은 촉땅에서 재기를 준비, 마침내 한신을 만나면서 항우를 이기기 시작
항우가 초나라, 유비가 한나라를 건국한 시점으로 이시점을 다룬 얘기가 바로 초한지
한나라
전한(기원전 206~서기 8) : 유방이 건국
후한(서기 23~220년)
광무제, 황건적의난, 유교의 쇠망
삼국시대(서기 220~280년)
삼국지의 배경 시대
위, 오, 촉 삼국
위의 사마의의 후손이 삼국을 통일
진(280~419년)
서진과 동진으로 이루어진 시대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은 중국의 왕조이다.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중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했다. 건국 초기 무제 사마염은 안정적인 정치로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져나갔으나, 말년에 사치에 빠져 온나라가 향락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은 중국의 서진 왕조가 유연(劉淵)의 전조(前趙)에 의해 멸망한 후, 사마예에 의해 강남(江南)에 세워진 진(晉)의 망명 왕조이다.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른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589년)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 강남에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또한 같은 건강(建康; 건업(建業)의 새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동진까지 합쳐 육조(六朝)라고 불러 이 시대를 육조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시대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문화와 불교 등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여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했다.
당(唐 618년 - 907년)은 수(隋)나라 이후 형성된 왕조의 국호이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장안을 수도로 삼고 건국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창국과 비단길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1대
당 고조
(唐高祖)신요대성대광효황제
(神堯大聖大光孝皇帝)이연(李淵)
무덕(武德) 618년 ~ 626년
618년 ~ 626년
제2대
당 태종
(唐太宗)문무대성대광효황제
(文武大聖大廣孝皇帝)이세민(李世民)
정관(貞觀) 627년 ~ 649년
626년 ~ 649년
요나라(遼, 916년 - 1125년)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네이멍구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상경 임황부, 카이펑 등의 수도가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서쪽으로는 몽골 고원동쪽의 몽골족을 공격하고 동쪽으로는 발해를 정복했으며, 만주에서 몽골고원 동쪽까지에 걸친 제국을 건설했다. 오대십국시대의 동북 강자로 군림하였다.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쇠퇴하다가 1115년에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들은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요나라가 멸망하고 일부 거란족들은 야율대석을 따라 지금의 중앙아시아에서 서요를 건국했다.
원(元 ; 중국 대륙 국가로서는 1271년~1368년, 유목국가로는 1271년~1635년)은 중국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영역을 지배하다가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 뒤(통칭 “북원”)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존속한 몽골인 왕조로서, 몽골 제국의 대칸 직할 세습령이었다. 정식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
중국 역사에서의 원나라는 송나라 다음에 등장한 통일 왕조이다. 이후 주원장의 명나라에게 중국 통일 왕조의 위치를 물려주게 된다. 하지만 원나라는 지배층뿐 아니라, 제도 및 문화에서도 기존 몽골 제국의 유목국가적인 특성이 강하다. 그 때문에 원나라라는 호칭 대신 유목민의 나라를 가리키는 울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원 울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나라, 청(淸) 또는 청 제국(淸帝國)은 1616년 동아시아의 북방민족인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이다. 초기에는 금(흔히 “후금”이라 부름)이었다가 후에 세력을 강화하여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청은 한족의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통합하여 몽골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이민족으로서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강건성세 때의 3명의 황제
[편집]강희제 (1661 ~ 1722)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로 즉위한다. 15세때의 친정을 시작하여 오배의 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함으로써 진정한 통일을 이루게 된다.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한다.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몽골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하며 서양 문물에 적극적이여서 서양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총애하였다. 광동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말년에는 그리 평온하지 못하였다. 69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편집]옹정제 (1722 ~ 1735)
강희제가 사망하자 45세의 넷째 아들 옹정제가 즉위한다. 옹정제는 형제의 난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다. 옹정제는 통치체제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먼저 세금을 단일화 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억누르는 문자의 옥이라는 사상탄압을 한다. 옹정제는 지방관리가 올린 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자신의 의견을 적어 보냈는데 이때 붉은 글씨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필이라고 불렀다. 하루 4시간밖에 자지않고 정무에 몰두하다가 과로때문에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편집]건륭제 (1735 ~ 1795)
건륭제는 몽골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왕조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완성하였다. 이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하였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등을 침공 속국으로 삼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구도 3억을 넘어섰다.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이 편찬사업을 통하여 한족지식인들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청조통치에 문제가 있는 내용들은 폐기하였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의 발전을 가져왔다.